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지샤 세력의 반발 === 고시라카와인이 유폐된 도바도노에는 후지와라노 나리노리·나가노리·세이겐(모두 신제이의 아들들) 세 사람과 뇨보(女房) 2, 3인 이외에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다. 유폐 다음날 키요모리는 인쵸의 연예(年預)・나카하라 무네이에(中原宗家)에게 인의 영지 목록을 작성하게 하고 12월에는 고인쵸(後院庁)가 설치되었다(《햐쿠렌쇼》). 고시라카와인이 가진 인 소유의 영지를 몰수하여 다카쿠라 천황의 영지로 짜넣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다. 지쇼 4년(1180년) 2월 21일에 다카쿠라 천황은 양위하고, 고인쵸의 인시(院司)였던 후지와라노 다카스에(藤原隆季)·요시다 쓰네후사(吉田経房)·후지와라노 나가카타(藤原長方)가 곧바로 다카쿠라 인쵸(院庁)의 벳토(별당)로 인사 이동함으로써 다카쿠라 인세이가 발족되었다. 유폐된 고시라카와인은 정월 하순부터 중병을 앓아, 타이라노 무네모리의 허가를 얻어 도바도노로 들어간 의관 와키 사다나리(和気定成)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구마노 참배를 가고 싶다” 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잔카이기》 2월 27일조). 3월에 다카쿠라 상황은 장인인 키요모리의 강한 요청으로 이쓰쿠시마 참배를 계획했는데, 기존의 관례상 상황이 처음으로 참배하는 곳은 교토 근교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궁(石清水八幡宮)·가모노 야시로(賀茂社)·가스가 야시로(春日社)·히요시 야시로(日吉社) 등으로 정해져 있었기에, 종교적 지위가 낮아질 것을 두려워한 엔랴쿠지・온죠지・고후쿠지는 다카쿠라 상황의 이쓰쿠시마 참배를 맹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세 절의 승병들이 연합해 다카쿠라인이나 고시라카와인의 신변을 탈취한다는 계획도 은밀히 진행되었지만 고시라카와인이 이러한 승병들의 움직임을 타이라노 무네모리에게 전하면서 폭로되었다(《교쿠요》, 《잔카이기》 3월 17일조). 무네모리는 사촌 형제인 타이라노 미치모리(平通盛)·타이라노 쓰네마사(平経正)를 도바도노에, 친동생인 타이라노 도모모리를 다카쿠라인의 고쇼에 보내어 경호를 엄히 했고, 후쿠하라의 타이라노 키요모리에게 앞으로의 일에 대한 지시를 의뢰했다.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인의 협력적인 자세에 다소 태도를 완화시켜 교고쿠노 쓰보네(京極局)・단고노 쓰보네(丹後局) 등 두 뇨보가 인을 섬기는 것을 허락했다(《잔카이기》 3월 17일조). 도바도노가 교토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경비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고시라카와인을 고조오오미야(五条大宮)의 후지와라노 다메유키(藤原為行)의 저택으로 옮기려 했지만, 무네모리가 >“히나미(日次)가 좋지 않다” 며 비판하여 지연되었다(《교쿠요》 3월 19일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